July 30, 2025

할머니와의 잊지 못할 음식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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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생생하게 기억하는 음식의 추억은 지나치게 익힌 스파게티와 할머니 필리스의 모습이다.

수십 년 동안 할머니의 나무 그릇은 그녀의 오래된 2층 집의 냉장고 옆 찬장에 쌓여 있었다.

그들은 그녀가 ‘신발 태그 도시’라고 사랑스럽게 부르는 팜데저트의 요양원으로도 따라갔다.

그녀는 자원봉사 건강 점검 위원회의 일원으로, 다른 거주자들에게 여전히 숨 쉬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전화를 했다.

그릇들은 한쪽이 비틀리고 매끄러웠으며, 수없이 많은 년 동안 리프톤 양파 딥과 스파게티를 긁어내느라 다듬어지고 변형되었다.

그녀가 91세의 나이로 7월 17일에 세상을 떠났을 때, 떠오른 첫 번째 기억은 바로 그 나무 그릇에서의 스파게티와 함께 나눈 모든 식사와 웃음이었다.

그것들은 크레이트 앤 배럴에서 찾을 수 있는 비싼 체리나 올리브, 아카시아 목재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었다.

그 나무는 얇고 눌린 듯 엮인 것으로, 치킨 너겟에 비유할 수 있는 저렴한 식기를 의미했다.

할머니는 거의 40년 전에 로스앤젤레스의 한 식당 공급 상점에서 그것들을 구입했다.

‘싼 나무 그릇’을 검색하면 비슷한 이미지들이 쏟아진다.

어린 시절 여름 내내 나는 할머니의 뒷마당의 삐딱한 풀밭에서 찢어진 수건 위에 눕고, 그 나무 그릇에서 음식을 먹으며 보냈다.

내 긴 머리는 항상 할아버지 워너가 수영하는 법을 가르쳐준 위에 둥둥 떠 있는 수조에서젖어 있었다.

“너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손녀야”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모든 손주에게 그렇게 말했다.

필리스와 워너는 유대인이었지만 결코 코셔를 지키지는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피코 대로에 처음으로 코셔 정육점에 문을 열었다고 자랑하곤 했지만, 그 이름이나 연도를 기억하지 못했다.

집에는 항상 베이컨이 있었다.

그녀는 베이컨을 플라스틱 쟁반에 넣고 전자레인지로 바삭 바삭하게 조리했다.

그녀의 가장 유명한 요리는 항상 그 나무 그릇에 육류와 치즈가 섞인 것이었다.

나의 구부러진 포크가 우드와 닿는 소리와 감각은 지금도 생생하다.

할머니의 스파게티는 항상 알 덴테보다 2분 더 익었다.

나는 국수를 혀와 앞니 사이에 끼워서 얼마나 많이 먹을 수 있는지 세곤 했다.

그 감각은 단순히 황홀했다.

고기 소스는 약간 짭짤하고 곱게 갈린, 법 없이 진행된 리프톤 스파게티 믹스의 맛으로 양념되었다.

갈은 소고기는 통조림 crushed 토마토와 완전히 하나가 되도록 으깨졌다.

할머니는 에메랄드 그린 원통 모양의 파마산 치즈를 식탁 위로 미끄러져 보냈고, 내가 그릇에 쌓을 수 있는 거대한 산을 지켜보며 그 양을 절대 의심하지 않았다.

나는 그릇의 홈과 찍힘을 살펴보곤 했고, 결국 우연히 나무를 씹어버리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뱃속에 작고 나무가 자라고 있는 건 아닐까?”

꿈으로 가득한 머리와 현실을 어렴풋이 잡고 있던 나는 곧 돌아올 가을을 기다리던 헬로키티 가방의 기분을 고통으로 바꾸기보다, 즐겁게 면을 흡입했던 그 식사가 언제나 특별했음을 행복하게 잊지 않았다.

그 그릇들은 약속이었다.

음식을 먹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만이라도 상관없이, 모든 것이 괜찮을 것이라는 것.

내가 이렇게 할머니에게, 나의 소중한 기억, 음식의 기벽과 선호를 보여주게 된 데에 감사하다.

필리스 해리스를 통해, 나는 레스토랑 주방에서 만들어진 어떤 것보다 리프톤 양파 수프 믹스 딥을 좋아하게 되었고, 작은 모임에서부터 제대로 된 파티를 여는 법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친구들이 내가 매해 한니카 파티를 위해 라트케를 만들도록 청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녀의 명절 대접은 전설적이어서, 금이 간 라트케, 브리스켓, 베이글, 록스, 화이트 피쉬가 줄지어 있었고, 항상 뉘리 레이크가 함께한 올리브 한 접시도 있었다.

나는 사촌들과 함께 올리브를 각 손가락에 끼워 넣고 집 안을 뛰어다녔다.

할머니는 ‘슈무츠 플래터’라는 무언가의 대가였다.

내 기억에선 누가 질병 저주를 발휘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 나였던 것 같다.

그것은 실제 platter라기보다는 다양한 델리 차가운 육류, 로메인 상추의 잎사귀, 피클 조각, 검은 올리브, 슬라이스 치즈(항상 하바르티와 대개 프로볼로네), 튜나 샐러드 한 그릇, 감자 샐러드 한 그릇, 호밀빵과 할라, 마요네즈와 머스타드의 작은 그릇으로 구성된 테이블 전체에 펼쳐지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자신만의 튜나 샐러드와 감자 샐러드를 만드는 동안, 코울슬로는 항상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에서 가져오는 것만 고집했다.

“케이프시나 아니면 나아갈 수 없어”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는 정말 그걸 의미했다.

나는 수없이 많은 친구들을 그 사막으로 데려갔고, 매번 도착하면 슈무츠 플래터가 다이닝룸 테이블에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단지 나 혼자 일 때에도, 그 플래터는 항상 있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대부분의 삶을 살았던 할머니는 도시의 다양한 요리 풍경을 잘 알고 있었다.

팜데저트로 20년 전 이사오고 당황했던 그녀는 가까운 곳에 아시아 시장이 없고, 로컬이라고 할 수 없는 딤섬 레스토랑이 있음을 깨달았다.

내가 방문할 때마다 그녀는 항상 랑거스 델리에서 굽는 이층 호밀빵 한 덩어리와 몇 개의 시우 마이 스시를 가져와 달라고 요청했다.

사막의 더위가 가득한 110도에서 우리는 그녀의 차로 30초 거리를 걸어서 가까운 라이트 에이드로 아이스크림을 사러 갔다.

그녀는 약국 대기실을 ‘아이스크림 카페’라고 부르며, 우리는 혈압측정기 의자에 앉아 콘을 핥았다.

나는 할머니를 한번만 설득해 초코 몰트 크런치(최고의 맛)를 주문하게 만들었지만, 그녀의 눈은 오직 무지개 셔벗을 향하고 있었다.

‘아이스크림 카페’에서 우리는 일이나 연애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결코 집요하게 탐색하는 방식은 아니었다.

그녀는 열심히 경청했고 결코 판단하지 않으며, 내가 줄 수 있는 충분한 것을 질문하지 않았다.

내가 내 콘의 바닥에 도달했을 때, 나는 세상의 한 사람만은 나를 이해해주는 것 같았다.

할머니는 손님을 초대하고 매주 카드 게임과 마작을 하기를 좋아했지만, 나이트 아웃을 사랑했다.

그녀는 머리를 정기적으로 금발로 고데기로 스타일링했고, 손톱도 항상 칠해져 있었다.

나는 그녀가 집을 나서거나 그녀의 침실을 나서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장 보러 갈 때와 여자를 만나러갈 때, 식사할 때와 쇼핑하러 갈 때 모두 드레스를 입었다.

우리는 종종 다양한 의상을 비교하는 미니 패션쇼를 개최하곤 했다.

엘 파세오 쇼핑 센터의 2층에 있는 수리안 스테이크 하우스는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었다.

할머니는 너무 자주 가서 항상 정해진 자리가 있었다.

그녀는 항상 레드 와인을 즐겼고, 나는 마티니를 마셨으며, 우리는 모두 바삭바삭한 상하이 오징어를 주문했다.

이것은 할머니에게 넘치는 사치와 요리의 절정이었다.

포인트 주디스, RI에서 나오는 튀김 오징어 한 접시가 달콤한 칠리 소스, 체리 페퍼와 파 scallions, 그리고 참깨로 코팅되어 있었다.

그녀는 항상 부드러운 타이핑으로 덮인 오징어 조각들을 즐겼다.

나는 이 글을 쓰며 그녀가 손가락에서 소스를 핥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나눈 훌륭한 식사는 팜스프링스의 ‘앨리스 B’에서였다.

메리 수 밀리켄과 수산 페니거의 레스토랑으로, 이날 저녁에 펴니거가 오셨고 친절하게 시설을 안내해 주셨고, Executive Chef 랜스 벨라스케즈의 우수한 비스킷을 맛보라고 추천해 주셨다.

할머니는 펴니거의 팬이었기 때문에, 요리사와 만난 것에 대해 설레임을 감추지 못했다.

할머니의 집에서 TV가 켜져 있다면, 거의 항상 요리 네트워크를 켜져 있었다.

우리는 비스킷의 질감에 감동했으며, 바삭함과 공허함의 조화를 즐겼다.

허니와 버터를 모두 다 먹어치웠고, 우리는 닭 튀김에 대한 사랑도 나누며 대화를 나눴던 기억이 난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할머니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할머니는 집에서든, 외식에서든, 식사 내내 음식을 소중히 여기고 감사하게 여기며 시간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시간이 지난 후에, 내 가슴의 이 아픔은 희미해질 것이지만, 나는 이러한 기억이 생생할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나는 그녀의 부엌의 냄새를 떠올릴 수 있고, 그녀의 포옹의 따뜻함, 방안을 가득 메우던 그녀의 웃음소리를 떠올릴 수 있다.

나는 그녀의 스파게티 맛을 기억하고, 그 나무 그릇의 홈을 느낄 수 있다.

감사합니다, 할머니, 당신 덕분에 이 삶이 얼마나 맛있을 수 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미지 출처:lati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