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타임스, 극단적 반트럼프 시위로 인해 언론의 신뢰 undermi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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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 타임스는 진보적인 도시에서 진리와 정의의 심판자로 자처하지만, 종종 가장 극단적이고 비현실적인 좌파 요소들을 위한 홍보 회사처럼 행동한다. 최근의 사례는 그의 진정한 언론 윤리를 드러낸 것으로, 몇몇 우울한 인물들을 영웅적인 행동주의자로 탈바꿈시켰다. 이는 단순히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는 것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되었다.
시애틀 타임스의 ‘좋은 문제는 계속된다는’ 시위에 대한 기사에서는 ‘약 일곱 명의 시위자가 거꾸로 거꾸로 든 미국 국기를 높이 들었다’고 언급하며, ‘존 루이스의 시대를 초월한 좋은 문제에 대한 호출’에 응답하고 있다고 설명하였다.
이 신문은 우리가 민주주의의 새로운 물결을 목격하고 있다고 읽을 수 있게 하고 있다.
“약 일곱 명의 시위자가 …”로 기사 시작하다니. 이는 헬시한 집합의 도달이나 마스터 피스나 일종의 고백이 아니다. 이는 단순히 몇몇 사람들이 집에서 나와서 무언가를 하려는 시도를 기록한 것이다. 만약 당신의 시위자가 ‘약 일곱’으로 요약된다면, 그로부터 어떤 의미를 추출하기는 어렵다. 극적인 긴장감이 없다는 것 – 그들이 간판을 들고 인도에 서 있는 몇 사람을 문서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 시애틀 타임스는 시위 사진을 게시했다. 찍힌 사진에는 단지 일곱 명만 있었다.)
영웅들로 묘사되는 그들!
시애틀 타임스는 도덕적 틀에 굉장히 의존한다. 시민 권리 아이콘들을 인용하고, 존 루이스의 ‘영원한 좋은 문제’의 외침을 인용하며 이 몇 몇 시위자를 현대의 해방자들로 묘사한다. 하지만, 시위 참가자가 열 두 명 이하로 떨어지면, 그 사건은 주목할 만한 뉴스 이벤트가 되지 않는다. 이는 얼마나 한계적인 운동이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애틀 타임스는 그들이 분명히 동정심을 가지고 있는 운동의 홍보자로서 행동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일곱 명의 시위는 보도용으로 유료 수준의 상세정보일 뿐이지, 1면 뉴스 전시물로 여겨질 만한 것이 아니다.
시위에 대한 보도는 규모, 영향 또는 중요성이 있을 때 유효하다. 왜 그런가? 그것이 뉴스이기 때문이다. 그 기준은 무엇일까? 수백, 수천—심지어 수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 진정한 봉기를 보도한 기자들과 단체에 물어보라. 경찰의 반응, 대중의 반응, 선출된 공직자들의 논의 모두가 의미 있는 본질을 창출한다.
하지만, 시애틀 타임스는 몇몇 활동가들을 거리의 열광으로 보도하려 한다. 만약 그들이 일변적인 뉴스였다면, ‘반트럼프 운동이 일곱 명의 헌신적인 묵상으로 줄어들었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왔다면 그건 뉴스일 것이다. 이는 상황에 대한 정확한 평가, 비하인드 스토리였다.
대신, 그들은 이 보잘것없는 모임을 ‘영웅성’으로 덮어주고, ‘행동주의’로 묘사하며 그 이유에 대해 독자들에게 알리지 않고 있다. 이것은 저널리즘이 아니다. 이것은 시애틀 타임스의 모습이다.
누가 빠지라면, 이 기사를 정확히 평범한 얘기를 청할 일이 아니라, 시애틀 타임스는 ‘좋은 문제’를 위해 앵커를 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언론의 신뢰에 명백한 미안을 남기고, 일곱 명의 시위를 영웅적 행동으로 탈바꿈시킬 때 그의 독자에 대한 실패일 뿐이다. 그들은 그것이 그들의 의제가 객관적 현실보다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이야기해야 할 진짜 ‘문제’다. 그리고 그건 ‘좋은 문제’가 아니다.
자신의 정치가 보도에 영향을 미치면 저널리즘은 선전이 된다. 기자의 펜이 그 기사를 위한 흥분에 흔들리고 있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뉴스를 창출하는 것
신문의 역할은 뉴스를 전달하는 것이지, 그것을 만들거나 정치당의 선전 기구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당신이 손가락으로 셀 수 있는 시위자라면, 그 시점에 기사는 없습니다. 그때는 그것이 보도가 아니라면, 포장과 마케팅이다. 그들은 그다지 통제할 수 없는 모습으로 보인다. 이 신문은 트럼프가 망가뜨린 것이다.
시애틀 타임스가 초라한 일곱 명의 시위를 영웅적인 행동으로 바꾸면, 그들은 단순히 독자에게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언론에 대한 신뢰를 손상시키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의제가 객관적 현실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한 ‘문제’다. 그리고 결코 ‘좋은 문제’가 아니다.
이미지 출처:mynorthw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