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리어 에토스: 워싱턴의 군사적 이상과 헤겟스의 군사 문화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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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9월 30일, 버지니아주 콴티코에 위치한 군사 기지에서 국방장관 피트 헤겟스는 전 세계에서 소집된 여러 미국의 장군들과 해군 제독들에게 군사 문화의 개혁을 목표로 한다고 발표했다.
헤겟스는 ‘워리어 에토스’라 불리는 전투적이고 강인한 군인 정신을 회복하기 위해 10개의 새로운 지침을 발표하며, 자신이 불만족스러운 ‘웍(g) 쓰레기’를 제거하겠다고 밝혔다.
‘워리어 에토스’라는 용어는 헤겟스의 정치적 정체성의 중심이 되었으며, 그는 2024년 자신의 저서 ‘전사에 대한 전쟁’에서 여성이 전투 역할에 포함됨으로써 이 에토스가 약화되었고, 결과적으로 미국 군대의 치명성이 감소했다고 주장했다.
헤겟스는 자신의 연설에서 미국 군인은 특히 고위 장교가 지녀야 할 자질과 미덕에 대해 언급하며, 신체적 체력과 외모에 대해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펜타곤의 복도에서 그리고 전 세계 지휘소에서 비만 장군들을 보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고 말했다.
신체적 외모에서 시작하여, 그는 면도 문제로 전환하며 “더 이상 수염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헤겟스의 연설은 ‘전사 정신’을 강조하였지만, 이는 조지 워싱턴의 군사 지도자에 대한 이상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워싱턴은 군사 지도자가 가져야 할 전반적인 비전이 헤겟스가 제시한 강경한 전사 관념과는 완전히 다르다고 여겼을 것이다.
워싱턴은 ‘비만 장군’에 대한 우려를 무관하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크다.
미국 독립 전쟁 당시, 대륙군의 가장 유능한 장교 중 일부는 비만으로 유명했다.
그의 신뢰받는 포병 지휘관인 헨리 녹스 장군은 약 280파운드였다.
프랑스 군관 샤틀뤼는 녹스를 “30세, 매우 비만하지만 매우 활기차고, 즐거운 성격을 가진 사람”이라고 묘사했다.
기타 장군들도 마찬가지였다.
샤틀뤼는 윌리엄 히스 장군을 “위풍당당한 열린 표정을 가진 고상한 인물”이라고 묘사하며, 그의 대머리와 “부풂”이 영국의 전설적인 영웅인 롭 그랜비와 비슷하다고 덧붙였다.
그랜비는 그의 용기와 관대함, 자신의 부하들에 대한 헌신으로 존경받았다.
워싱턴은 비만을 자격 박탈의 이유로 보지 않았으며, 자신이 비만한 장군들에게도 지속적으로 중요한 임무를 맡겼다.
그는 강력한 요새 설계와 포병 지휘, 그리고 폭발적인 콜롬비아로부터 보스턴으로 포를 가져온 전설적인 ‘귀족 포대’ 작전을 맡기기 위해 녹스에게 맡겼다.
워싱턴은 혁명 후 대통령이 되었을 때 녹스를 첫 전쟁 장관으로 임명했는데, 이는 그의 판단력과 무결성에 대한 지속적인 신뢰를 보여준다.
헤겟스의 면도 정책과 달리, 워싱턴은 면도에 대한 우려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맞지만, 그 이유는 다르다.
그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 특히 군인들에 대한 얼굴 털에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수염은 단정치 못하고 불결하게 보인다고 여겼다.
워싱턴은 수염이 남성을 ‘군인답지 않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는 모든 군인이 공공장소에서 “가능한 한 최상의 상태로 자신을 가꾸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는 단순한 외적 모습이 아닌 내적 규율을 반영한다고 믿었다.
그에게 있어, 군인의 외적인 모습은 내적 규율을 상징했고, 잘 정돈된 신체는 잘 정돈된 사고를 낳는다고 여겼다.
그의 평생의 전투는 모든 형태의 부정함에 맞서는 것이었으며, ‘부정함’은 항상 ‘군인이 지켜야 할 품격’에 어긋난다고 여겼다.
워싱턴은 겸손, 재량, 자기 인식을 의미하는 ‘품격’을 강조했으며, 이러한 특성들이 진정한 리더와 감정에 휘둘리는 개인을 구별한다고 믿었다.
그는 군인의 첫 번째 승리는 항상 자기 자신의 승리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의무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이 내면에서 몰고 있는 감정이나 의무감이 적절한 판단을 인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워싱턴은 전사 활동이 전투의 짜릿함에 이끌려가서가 아니라, 자기 절제, 인내, 그리고 차분함을 발휘하는 가장 높은 교육이라고 여겼다.
그의 ‘워리어 에토스’는 도덕적 이상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워싱턴의 이상적인 군사 지도자는 전사보다는 정치가에 가까웠으며, 그는 군사력이 도덕적 제약 안에서 행사되어야 한다고 기억했다.
그는 군대가 특별한 집단이 아니라 공화국의 도구로 봤고, 시민적 미덕을 시험하는 장소로 생각했다.
후세 사람들은 그를 ‘공화주의자 장군’의 모델로 칭했으며, 그는 허세나 과시가 아닌 차분함과 신중함, 절제를 바탕으로 권위를 가졌다.
헤겟스가 콴티코에서 보여준 비전은 워싱턴의 반대편에 있었다.
헤겟스가 찬양한 ‘워리어 에토스’는 소란스럽고 특별한 것이었지만, 반면에 워싱턴은 군인이 이겨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예측할 수 없는 감정의 표출이었다.
1778년 3월, 마르키스 드 라파예트가 불가능한 겨울 캐나다 원정을 포기했을 때, 워싱턴은 젊은 감정을 우선시하기보다 신중함을 칭송했다.
“신체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려고 하는 프로젝트를 포기한 것에 대한 당신의 신중함을 모두가 칭찬하게 될 것이다”라고 그는 발리 포지의 눈 쌓인 곳에서 말했다.
워싱턴에게, 용기는 결코 recklessness와 같지 않으며, 성공은 혈기보다 오히려 먼 안목에 달려 있다고 여겼다.
결국, 워싱턴은 체중이나 수염에 대해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고, 그가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정신의 규율이었다.
그의 ‘워리어 에토스’는 덕성, 절제, 그리고 분노에 굴복하지 않고 용기 있게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 이상은 군대를 조직하게 하고, 결국 공화국을 구축하는 토대가 되었다.
이미지 출처:theconvers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