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tember 13, 2025

록포트와 웨스트 레이크 힐스의 시더 쵸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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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의 아이들이 롤링우드와 웨스트 레이크 힐스를 형성하게 될 땅에서 뛰어 놀았고, 바에서는 도끼로 잘린 팔다리가 남는 싸움이 벌어졌다.

불법적인 밀주 작업이 동굴에서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돈을 다 쏟아 붓고는 바닥에 나가서 거대한 싸움을 벌였어요,’ 라고 벤 리빙스턴은 말하며, 오스틴 서쪽에서 살았던 이들을 회상했습니다.

리빙스턴은 이들이 시더 쵸퍼라고 불리는 신비로운 사람들로, 텍사스 힐컨트리에서 생계 수단으로 시더 나무를 베는 삶을 가졌다고 전했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베어버리곤 했어요,’ 라고 그는 덧붙였습니다.

리빙스턴은 이 소위 ‘시더 쵸퍼’들에 대한 이야기에 매료되어 여러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하게 되었고, 결국 ATXplained에 질문을 보냈습니다.

‘시더 쵸퍼란 무엇이며, 그들은 어디서 왔고 왜 이곳에 오게 되었을까요?’ 라고 말이죠.

그는 ‘시더 쵸퍼’라는 용어가 주로 비하적인 의미로 사용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스틴 주변에서 ‘저 녀석들은 시더 쵸퍼들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자주 들었어요,’ 그는 전했습니다.

시더 쵸퍼에 대한 이야기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역사가와 인구 조사 기록에 따르면, 사람들은 남북 전쟁 이후 아팔래치아 지역에서 텍사스로 유입되었습니다.

그들은 시더 나무를 자르고 목재를 판매하여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이들은 ‘시더 쵸퍼’로 알려지게 되었고, 그들이 찍은 나무는 농장과 농장의 울타리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이 도시의 사람들은 그 나무를 가지고 따뜻하게 집을 데우거나 요리를 했습니다.

1890년대 후반에는 시더 쵸퍼 서비스를 찾는 신문 광고도 흔했습니다.

‘나무! 나무! 나무! 50명의 시더 쵸퍼를 원합니다.’라는 광고도 있었습니다.

또한, 백인 시더 쵸퍼만을 요구하는 광고도 존재했습니다.

켄 로버츠는 《시더 쵸퍼: 아무것도 없는 가장자리에 사는 삶》이라는 책의 저자입니다.

그는 해마다 시더 쵸퍼들이 콜로라도 강과 그 지류 주변에 살았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들 가족은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사람들이 말할 때 ‘클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곤 했어요. 각 클랜은 자신들이 살던 특정한 개울에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나무를 베는 법을 가르쳤고, 여러 세대에 걸쳐 힐컨트리에서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돈이 부족해질 때마다, 일부는 도시 사람들에게 밀주를 판매하기도 했습니다.

시더 쵸퍼들은 텍사스 힐컨트리를 지배했고, 그들의 커뮤니티가 성장하면서, 로버츠는 시더 쵸퍼들이 오스틴에서도 점점 더 커지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신문의 헤드라인에는 시더 쵸퍼들 간의 폭력적 충돌에 대한 보도도 있었습니다.

엠멧 쉘턴은 이러한 사건의 중심에 자주 있었습니다.

1978년의 녹음에서 그는 시더 쵸퍼들이 법정에서 어떤 후원과 도움을 받아야 했는지를 이야기했습니다.

‘한 밤, 구식 전화로 한 통의 전화를 받았어요. 존 티그가 그의 술집에서 미스터 게스트를 죽였다는 거였죠.’

쉘턴은 법정에서 존을 도와주었고, 그 후 존의 동생인 톰 티그와 친분을 쌓게 됩니다.

‘톰은 좋은 덩치의 소년으로, 돌로 토끼와 다람쥐를 죽였습니다.’ 라고 그는 설명합니다.

‘그는 숲에서 돌을 던져서 생계를 이어갔는데, 그에게는 던질 돌이 많았습니다.’

어느 날, 톰은 돌싸움에 휘말렸습니다.

‘톰이 어떤 소년의 등에 돌을 던져서 등을 부러뜨렸고, 그 소년은 죽고 말았어요.’

‘그때 그 싸움은 공정한 싸움이었습니다.’

쉘턴은 톰을 변호해 그가 15달러의 벌금을 부과받기에 이릅니다.

리바 필은 시더 쵸퍼의 후손입니다.

그녀는 딸과 함께 조경 사업인 ‘A Lot 4 Less’를 운영하여 가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돈은 나무에서 열리지 않나?’라고 그녀는 말합니다.

필은 리버사이드 드라이브 남쪽 근처에서 성장하였고, 그녀의 가족이 시더 쵸퍼 커뮤니티에서 어떻게 보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수십 가지 가지고 있습니다.

그녀의 가족은 치킨 싸움에 참여하였고, 그녀는 5,000달러에서 10,000달러까지의 상금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때는 그게 큰 돈이었어요. 최고였죠.’

‘어떤 해에는 아버지가 치킨 싸움에서 이기고, 그 상금으로 고카트를 받았어요.’

그러나 개싸움도 있었습니다.

필은 이런 싸움을 지켜봐선 안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나이가 많아서 너무 궁금해서 창밖으로 지켜봤어요.’

‘절대 잊지 못할 거예요. 잔인하고 트라우마적인 경험이었어요.’

필은 동물만의 싸움이 아니며, 카드 게임이나 수탉 싸움으로 인해 시더 쵸퍼들이 서로 싸우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대부분은 술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고 전하며, 시더 쵸퍼 가족들은 자신들의 규칙을 갖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싸울 수 있지만, 우리의 사람들에게 손을 대는 사람은 모두 싸워야 해요.’

현재 필은 더 이상 나무를 베지 않지만, 2025년까지 가족은 대부분 그렇게 생계를 유지하였다고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새로운 세대가 이 전통을 이어받지 못할까 걱정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컴퓨터와 게임에만 빠져 있고, 게으르며 밤늦게까지 놀고 낮에 자는 것을 좋아합니다.’

필은 그녀의 아홉 명의 손주들에 대해 그렇게 언급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남겨준 생존 기술이 부족합니다. 어디를 가든지 체인을 들고 있다면 생계를 이어갈 수 있습니다.’

그녀는 시더 쵸퍼가 된다는 것은 매일 매일 살아남는 것이라고 하며, 그녀의 문화가 사라질까 두렵다고 전했습니다.

필의 조상들은 바톤 크릭 스퀘어 몰 근처에 있는 타를턴-영 묘지에 묻혀 있습니다.

그곳은 풀밭이 자라고 있고, 털이 쌓여 있습니다.

약 30개의 비석이 세월의 시험을 견뎌냈으며, 어떤 것은 그렇게 잘 보존되지 않았습니다.

‘모든 비석에 글자가 적혀 있는 것은 아니며, 어떤 것은 매우 오래되었고, 어떤 것은 읽을 수 있습니다.’

필의 막내 자매인 크리스티 보이드는 묘지를 운영합니다.

그녀는 일부 비석이 잘못된 방향으로 되어 있다고 전하며, 그것은 대부분의 시더 쵸퍼들이 교육을 잘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전했습니다.

보이드는 자신의 길을 따랐고, 가족 중 유일하게 대학교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시더 쵸퍼들의 묘지를 보존하는 일에 관심을 두게 되었고, 역사적 표식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녀는 연구를 하며 자부심이 없는 정보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내가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나쁜 것, 즉 이 사람이 저 사람을 죽였다는 거예요. 이 사람이 저 사람 때문에 감옥에 갔었다는 거죠.’

가장 오래된 비석은 톰 영이라는 남자의 것이며, 1906년에 셸턴 가족이 그를 변호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는 윌리엄슨 카운티에서 마지막으로 공개적으로 교수형에 처해진 사람이었습니다.

보이드는 부정적인 보도와 그녀의 커뮤니티에 대한 태도가 시더 쵸퍼들을 보는 자신의 관점과 맞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시더 쵸퍼 소년들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돈이 가득 찬 주머니를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보이드는 시더 쵸퍼 문화가 여전히 존재하지만, 예전과 같은 형태는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그녀와 필의 가족은 이제 킐린 북쪽의 게이츠빌에 살고 있습니다.

시더 쵸퍼들이 도시를 세운 오스틴은 그들에게 너무 많이 붐비게 되었습니다.

‘그 언덕들은 항상 백만 달러짜리 집이 아니었습니다. 예전에는 작은 오두막들이었습니다.’

보이드는 ‘그 사람들은 그곳에 처음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그 커뮤니티가 존재하는 것이죠.’

그녀는 ‘시더 쵸퍼’라는 용어를 비하적인 것으로 본 적이 없으며, 아티티에 있는 것들 중 그들의 역사를 계속해서 보존하고 싶다고 전했습니다.

비록 남아있는 것이 그들의 역사일지라도 말이죠.

이미지 출처:ku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