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ust 26, 2025

음악, 교육, 그리고 쇠퇴: 세 가지 전시가 말하는 회복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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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전시들이 음악 스타, 공교육의 구조, 그리고 낡은 상점 간판을 통해 회복의 가능성을 모색하며 우리 사회의 복잡한 문제들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고 있다.

하와킨스 헤드쿼터에서는 아이작 메기(Isaac Mehki)가 엘비스 프레슬리의 남성성을 다루는 개인전 ‘더 킹 & 더 그레이트 화이트워셔(The King & The Great Whitewasher)’를 통해 관람객들과 만난다.

이 전시는 다양한 매체를 사용하여 엘비스 프레슬리를 탐구한다. 지난 1년 동안 메기는 고인이 된 음악가로서 그의 매너리즘과 카리스마, 외양을 체화하며 살아왔다.

전시의 중심에는 단순한 퍼포먼스가 자리하고 있으며, 그가 엘비스로서 반전하는 과정은 전시의 다른 모든 작품의 기초가 된다.

그의 작업 중 ‘더 킹 & 아워 컨페더레이트 데드(The King & Our Confederate Dead)’는 메기가 컨페더레이트 기념비 앞에서 홀로 춤추는 장면을 담고 있다.

또한, ‘더 록킨 리벨 & 더 파피 필즈(The Rockin’ Rebel & the Poppy Fields)’에서는 머리 스타일링 제품, 작가가 의상을 입은 폴라로이드 사진, 가죽 재킷 등이 함께 배치되어 있다.

이 작품들은 퍼포먼스를 유지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유물로, 이제는 또 다른 작품의 일부가 되었다.

전시 전반에 걸쳐 느껴지는 엉성함은 하나의 사물을 명확히 제시하는 데에 복잡성을 더하며 관람객들이 단순한 해석을 넘어서도록 유도한다.

메기는 이 전시를 통해 전설적인 인물의 재소유를 시도하는 동시에 그에 대한 도전도 하고 있다.

엘비스는 단순한 남부의 백인 가수가 아니라, 분열의 시대에 살아간 화장한 공연자이자 여성 편력가이며, 이러한 역사적 맥락은 결코 관대하지 않다.

그의 인물화는 매혹적으로, 쉽게 감정을 집어삼킨다.

한편, 존슨 로우 갤러리에서는 Paula Henderson의 전시 ‘구조와 조형(Structure and Stricture)’가 진행되고 있다.

이 전시는 인체, 농구 코트, 건설 현장 등 다양한 시각적 모티프를 활용해 사회의 복잡한 사회적 구조를 해석하려 한다.

Henderson은 반복을 통해 이 목표를 달성하며, ‘코르트[고백]비마인[3](Court[ed]BeMine[3])’에서 농구 코트의 선들이 구성에 기초를 둔다.

큰 중앙 코트는 주변에 여러 작은 코트를 둘러싸고 있으며, 마치 장식적인 테두리처럼 보인다.

회색과 빨간색의 색조로 그려진 이 작품은 악의가 가득 차 있다.

하나의 농구 코트는 스포츠와 경쟁의 언어를 전달하지만, 여러 개로 쌓이면 그 의미가 흐려지고 그와 관련된 연상작용이 사라진다.

이 전시에서 가장 강력한 점은 복잡성이 단순히 반복하는 것으로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whitespace 갤러리에서는 케이트 버크(Kate Burke)가 주최한 ‘러버넥킨(Rubberneckin’)’ 전시가 진행 중이다.

이 전시에서 보여지는 작품들은 세상의 종말을 암시하지만, 그 속에서도 기발한 유머를 잃지 않는다.

매튜 에반스(Matthew Evans)의 ‘다크 사이드 오브 더 문(Dark Side of the Moon)’에서는 웃는 얼굴과 찡그리는 얼굴이 그려진 공이 기댈 곳 없이 떠돌며 회전하고 있다.

이 작품은 마치 고립된 마을에서 갓 문을 연 레스토랑 앞에 있는 간판처럼 비극스럽고도 유머스럽다.

이렇게 전시의 중심으로 들어갈수록 기묘한 사건들이 계속 펼쳐진다.

안토니오 다든(Antonio Darden)의 ‘페드(Fed)’에서는 저렴한 커튼 뒤에서 기기를 숨긴 모니터가 눈에 띈다.

해당 모니터에서는 관람객에게 다가가며 자신을 촬영하겠다는 남자의 비디오가 재생된다.

이는 가족 모임에서 문제적인 농담을 듣는 듯한 불편함을 자아낸다.

관람객들은 애써 눈길을 돌리고 싶지만 그렇지 못하는 그 어색함이 전시를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가끔은 세상 주위가 불타고 있으며 우리는 그 속에서 스스로를 위안하려 한다.

하지만 이번 전시는 어느 재앙적 상황에서도 회복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게 해준다.

마치 타이타닉에서 연주한 음악가들처럼, 우리는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서도 우리의 존재감을 계속 주장할 수 있다.

이미지 출처:artsat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