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이. 와흘렌, 전쟁 영웅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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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중반 오그던 시내의 모습을 담은 엽서가 있다.
와흘렌은 1930년 핑그리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 당시는 여전히 그랜트 애비뉴에서 살고 있었고, 생계유지가 힘든 상황이었다.
대공황(1929-1939)으로 많은 일자리가 사라졌지만, 와흘렌 가족은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어찌된 운이 좋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활은 여전히 힘들었다.
와흘렌은 가족을 도우기 위해 낚시꾼들에게 밤지렁이를 파는 일을 하며 용돈을 마련했다.
1936년까지 가족은 오그던 외곽에 있는 1,200달러(2025년 기준 약 28,000달러)의 집과 10에이커의 땅에 대한 계약금을 마련할 만큼 돈을 모았다.
제2차 세계대전과 미래의 방향
와흘렌은 고등학교 시절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이 발발했을 때, 1941년 11월 학교를 중퇴하고 직업학교에 다니기로 했다.
아버지의 승인을 받은 후, 그는 항공기 정비학교에 등록하며 아버지 알버트는 아들이 전쟁에 가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가 수업을 시작하기 하루 전 일본군이 하와이 진주만을 폭격하였고, 이는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수업이 시작되었을 때, 한 미군 모집관이 17세의 와흘렌에게 접근했으나 그의 아버지 알버트는 아들의 입대 서류에 서명을 거부했다.
실망한 와흘렌은 다른 방법으로 복무할 방안을 고민했다.
1942년 항공기 정비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오그던 인근의 힐 필드(지금의 힐 공군기지)에서 비행 검사 섹션의 일원으로 항공기의 비행 가능성을 평가하는 일을 시작했다.
8개월 후, 그는 우수한 성과로 정비 팀장을 맡게 되었고, 다섯 명의 다른 정비사를 감독하게 되었다.
훈련 많은 훈련
1943년 6월, 18세의 와흘렌은 솔트레이크 시티 외곽의 포트 더글러스를 방문하여 징집에 등록했다.
그는 징집당할 경우, 아버지가 자신의 전쟁 참여에 대해 화가 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징집은 군 복무 직책(MOS)을 선택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자신의 경력을 고려했을 때, 그는 공군 정비사로 배치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상황은 그렇게 진행되지 않았다.
그는 대신 미 해군의 군의관으로 임명되었다.
해양 훈련 센터 마인 게이트,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
그는 잘 학습하여 정비사로 전환되기를 희망했지만, 교육을 마친 후 전쟁에서 군의관이 필요하다는 통보를 받았다.
의학 교육이 끝난 후, 그는 샌디에이고의 해군 병원 내 ‘위장병 입원실’에서 첫 번째 군 복무를 시작했다.
이 일은 바닥 청소, 침대 변기에 대한 관리, 간호사들의 지시를 따르는 것과 같은 권한이 전혀 없는 일이었다.
그는 더 나은 직무와 승진에 대해 문의하기 시작했다.
승진은 미 해병대에 배치되거나 바다로 보내지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자살 임무로 여겨졌다.
간호사와의 갈등 후, 와흘렌은 자신의 일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해병대에 자원했다.
그는 그 다음 날 캠프 엘리엇에서 훈련을 받았다.
1944년 12월 1일까지 그는 캘리포니아의 새로 설립된 캠프 펜들턴에 도착하여 훈련을 강화했다.
훈련이 끝나고 1944년 7월까지 그의 부대는 배치 준비를 마쳤다.
그 달 말, 그들은 하와이 힐로에 있어 캠프 타라와에서 더 많은 훈련을 완수했다.
훈련의 목적은 전투 지역의 지형을 이해하는 것이지만, 그들이 어디로 향할 것인지에 대한 정보는 전혀 없었다.
이오지마
크리스마스가 임박한 1944년, 캠프 타라와에서 주둔 중인 병사들은 전투 준비를 시작했다.
와흘렌은 USS 호킹(APA121)에서 하숙지의 해맨크를 얻었다.
몸에서 나는 냄새, 음식, 구토의 냄새가 나는 배에서, 와흘렌은 가능한 한 많이 상단으로 갈 이유를 찾았다.
의료 지원자는 언제나 그의 해병대원 가까이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는 항상 자신의 부하들과 함께 있도록 허가받았다.
적의 포탄을 피하며 홀로, 와흘렌은 깊은 화산 모래에서 자신의 방어 위치를 만들었다.
누군가 도움을 주지 않는 상태에서, 그는 놀라운 일이라며 첫 밤에 몇 시간 잤으나, 그의 참호에서는 불길한 소음에 의해 깨워졌다.
어둠 속에서 소음을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손으로 느껴보며, 와흘렌은 자신을 겨우 피하는 크기의 파편을 발견했다.
뜨거운 금속조각은 시원하고 젖은 모래 속에서 지글지글거렸다.
3일 후, 와흘렌은 친구들이 끔찍하게 죽고, 적이 불타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는 머리 부위, 부분적으로 꼭지머리, 팔, 배를 모두 다치게 하고 드레싱을 했고, 그의 첫 번째 해병 중 한 명은 그를 돕고 나서 후에 사망했고, 이는 그의 마음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다음 10일 동안 그는 두려움을 잊고 오직 자신의 일이기에 집중해야 했다.
D+7
와흘렌이 섬에 첫 7일이 지났을 때, 그는 첫 사고를 당하였다.
그가 한 해병을 돕기 위해 기어가고 있을 때, 수류탄이 그의 바로 앞에 떨어졌다.
그는 최대한 몸을 숙이고, 모래는 폭발의 충격을 흡수하고, 파편이 하늘로 튕겨 나갔다.
하지만 그는 폭발에 의해 기절을 했고 얼굴에 파편이 엉망이 되어 오른쪽 눈을 간신히 피했다.
일시적으로 시각을 잃고 얼굴에 피가 묻어 있으면서 그는 몇 분 동안 언덕에 누워있었다.
와흘렌은 뭘 해야 할지를 정리하며, 회복된 정신력을 되찾았다.
상처를 드레싱하고 눈을 얼룩에서 막은 후, 그는 숨을 쉴 곳을 찾기 시작했다.
다른 해병을 돕기 위해 기어갈 때, 그는 누군가가 동굴에서 수류탄을 던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오직 권총만을 지닌 상태로, 와흘렌은 아래로 수류탄을 요청했다.
적을 향해 나아가면서, 그는 뒤에서 폭발하는 수류탄에 의해 다시 부상을 입게 되었다.
파편이 그의 둔부와 다리에 깊숙이 박혔다.
치료하러 가는 길에, 그는 동굴을 내려다보았다.
2×6 피트의 틈이 보였다.
그가 적이 튀어나와 수류탄을 던지다가 다시 동굴로 돌아갈 것 같았다.
와흘렌은 조용히 수류탄을 꺼내며 핀은 구부러져 있었다.
그는 자신의 카바르로 핀을 고쳤고, 핀을 뽑자 두를 세고 수류탄을 동굴 안으로 떨어뜨렸다.
적 병사가 튀어나오자 폭발과 함께 즉사했다.
상처를 입고도 굳건한 결심으로 와흘렌은 후에 해병을 구출하기 위해 물매로 옮겼다.
산 아래로 와흘렌은 계속해서 해병들을 돌보았다.
한 동료 군의관이 다시 치유 공급품을 가져오지 않으므로 화가 난 와흘렌은 직접 뒤로 돌아가서 공급품을 가져왔다.
그의 상태를 본 장교는 그에게 어떻냐고 물었다.
“왜 스스로 보지 않으세요?”라고 와흘렌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는 응급대에 보내지지만, 다시 현장에 남아 외에 공급품을 챙길 수도 있도록 거부했다.
D+11
와흘렌이 상반신이 다친 해병을 줄려가고 있을 때, 포탄이 뒤에서 폭발하였다.
폭풍이 그를 날려버렸고 그는 혼란스럽고 피투성이로 날아갔다.
몇 분 후 몸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음으로 그는 다시 일어났다.
와흘렌은 자신의 상처에 대해 뒤를 돌아보지 않기를 원하는지, 해병이 샌드위치 되어 있다고 물었다.
“오, 의사님, 괜찮으세요. 등 쪽에 큰 덩어리가 빠졌습니다.”라는 답변이었다.
倒れた 해병은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잔여 상체를 부여잡고 있었고, 다행히도 그는 약 한 시간 후에 왼쪽 어깨와 팔의 감각을 되찾았다.
D+12
다시 전장에서 돌아온 와흘렌은 해병들을 저울로 측정해야 했다.
그가 궤도를 지나가던 중 두 번째 포탄이 떨어졌다.
와흘렌은 확인할 수 있도록 떨어졌고 두 명의 피난민이 신속히 대처했다.
와흘렌은 도움을 주려고 했지만, 다리를 거쳐 갈 수 없었다.
공격이 이어지며 비명소리가 들렸고, 수병이 그를 요청 했다.
포기하지 않고 그는 자신의 부상당한 다리를 감싸고, 통증을 위해 마약을 주사했다.
그들의 소 중에서 50 야드 정도 기어가 풀어놓은 상태로 2명의 다리부상 해병을 돕는것이었다.
용도로따라 마침내 그들은 안전한 위치의 웅덩이 뒤에서 피난을 위해 대기했다.
섬 내에서 그는 60명의 환자를 지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중 몇은 그가 맡고 있던 해병대원이 아니었다.
이오지마 해안에서 병원선 대기 중
그러나 그의 부러진 다리는 제대로 치유되지 않았고 추가 치료가 필요했다.
해군은 그를 진단 후 항해를 시켜주었고, 치료가 어려워 계획을 Camp Pendleton으로 이관했다.
수술 후 그는 다시 산을 걸을 수 있지만, 그의 다리에는 만성적으로 통증이 남게 되었다.
1945년 7월, 와흘렌은 30일간의 회복을 위해 유타의 부모님 집으로 되돌아 갔다.
그는8월초에도 여전히 집에 있었는데, 일본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원자폭탄 투하로 일본은 무죄비을 선언한 의미가 커졌다.
영웅적으로 인정받다
그가 전쟁이 끝났다고 발표된 1945년 9월 2일, 오래된 해군 병원이 되어 있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와흘렌은 자신이 Iwo Jima에서의 행동에 대한 공로로 해군 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와흘렌은 10월 초에 워싱턴 D.C.의 해군 병영으로 명령을 받았다.
그는 명령이 육상에 배치된 부분인지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남군 칭호로 섭외를 받았다는 사실을 다게 된 것이다.
조지 와흘렌의 메달 참사
그의 메달을 수여 받은 날인 1945년 10월 5일에, 그 끝자락에 여전히 회복하고 있는 해군 군의관은 전쟁 중 활동으로 수여 받은 14명 점원 중 한 명이었다.
프랭클린 E. 시글러도 동날에 금박으로 메달을 받았다.
와흘렌은 유타 출신의 제2차 세계대전 퇴역 군 속에서 세 번째로 수여 받으신 분으로, 그는 주요인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의 부모님은 그의 성공에 대해 기뻐했으며 역시 세레모니에 참가할 예정이었다.
와흘렌은 긴장하며, 벅찬 희망으로 많은 군 고위, 정부 관리와 해리 트루먼 대통령 앞에 서 있다.
그가 메달을받는 중 손을 대잇는 것이 걱정되어 손은 세워졌다.
그러나 트루먼은 그에게 다가가며 “모든 해병대 중에서 이런 약제를 가진 사람을 만나다니 정말 반가워요.”라고 속삭였다.
와흘렌과 멜바 홀리, 1946년
1946年6月, 와흘렌은 멜바에게 프로포즈를 하길 원했다.
하지만 그녀는 17세였고, 그녀의 아버지는 와흘렌의 흡연과 음주를 반대하며 “안 돼”라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녀가 18세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
1946년 8월 16일, 그들은 결혼했다.
다음 해, 첫 아이의 출생을 기념했다.
이와 반응한 와흘렌은 이오지마를 떠난 후로 악몽에 시달렸다.
그러나 멜바와 결혼한 후 그는 다시는 악몽을 꾸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육군 경력
이 평화로운 기간을 즐기며 와흘렌은 G.I. 법의 혜택을 통해 웨버 주립대학교에서 교육에 힘을 쏟게 되었다.
그는1948년 준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우편요금처에서 우편 부분관리로 채용되었다.
하지만 그 일만 몇 개월 지나지 않아, 그는 한 행사에서 육군 모집관을 만났다.
그 모집관은 그것이 자랑했고, 와흘렌에게 계속해서 교육을 받을 수 있으며 즐거운 직종을 따라가보라고 했다.
와흘렌은 속았습니다.
1971년 11월, 그는 상사로 임관했다.
하와이에서의 와흘렌 가족
1966년, 와흘렌은 하와이 교회대학교(투하와이교대학)의 학장을 마쳤고, 트리플러 육군의료센터의 인사 담당자가 되었다.
1966년 11월, 그는 소령으로 진급했다.
멜바는 마지막 아이 임신 중에 그에게 베트남으로 온다는 발령이 떨어졌다.
그는 1968년 1월, 제68 대전의 공격 몇 달 전, 사이공 근처의 롱빈에 도착했다.
그는 의무 사무실의 보조 책임자로서 근무하며, 베트남에서의 작전에 대한 공로로 동메달을 수여받았다.
캘리포니아에서의 체류 중, 그는 아내 멜바의 종교와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에 더 많은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흡연은 거기에 관여하는 것을 방해하였다.
결심한 와흘렌은 베트남에서 담배를 끊어버리기로 하였고, 수십 년간 교회 서비스를 이어갔다.
와흘렌의 베트남 투어는 1968년 5월에 종료되었고, 멜바와 아이들은 하와이에서 그와 다시 재회하게 되었다.
이 기쁜 만남에서 제일 아기 아들을 처음으로 만났다.
재회 후 곧, 그는 후아취카 포트에 다시 배치되었다.
전역 후의 삶
1969년 8월 11일, 소령 조지 와흘렌이 육군에서 퇴역하였다.
그는 가족과 함께 유타로 돌아가 로이에서 집을 구매하였다.
그의 다음 경로가 무엇인지는 여러 번 시도하였으며 어려운 일반 결정을 하였다.
처음에, 그는 뉴욕 인생 보험의 판매자가 되기로 하였고, 유타 주 세무위원회에 잠시 근무하기도 하였다.
조지 와흘렌의 과거 엘프 포스 기반 지역 광고, 1970년
1971년, 그는 재정책 대표로 행정국에서 백 세법 인사 정책을 자처하였다.
와흘렌은 퇴역 군인들에게 G.I. 법을 활용하여 교육을 이수하게 도왔다.
특히 그의 모교 웨버 주립대학교에 다니기에 적합하였다.
1983년, 그는 VBA에서 퇴직하고 장애인 퇴역 군인들이 적합한 주거지를 찾는 수단을 도와주기도 하였다.
그는 자신의 메달을 이용하여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에 접근하기 위해 더 많은 지역 퇴역 군인 문제에 대해 계속 찾기 시작했다.
1986년, 와흘렌은 캠프 윌리엄스 근처의 주립 퇴역 군인 묘지 자금을 위한 기부 캠페인을 시작했다.
몇 년이 지나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유타 퇴역 군인 묘지가 1990년 문을 열었다.
와흘렌의 노력은 간과되지 않았다.
유타는 1986년 유타의 유일한 생존 메달 오브 아너 수상자에게 독특한 번호판을 부여하였고, 1989년 로이에 있는 공원이 조지 와흘렌 북부 공원으로 명명되었다.
와흘렌은 계속해서 유타 퇴역 군인들에게 도움을 받을 방법을 찾으려고 하였다.
곧 그는 그가 원하는 요양원 만들기에 대한 생각을 시작했다.
그 당시 유타에서 퇴역 군인의 부양을 위한 요양원은 없었고, 인근 주에서 다수의 요양원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를 해결하기 위해, 와흘렌은 유타를 위한 80병상 시설을 제안하였다.
1998년에 조지 E. 와흘렌 오그던 퇴역 군인 집이 문을 열고 빠르게 가득 찼다.
가족이 전쟁의 역사를 알다
1995년, 와흘렌의 가족은 그들의 조상의 경험에 대해 모두 알게 되었다.
이오지마 전투의 50주년 기념일 동안, 와흘렌은 1995년 2월 애틀랜타에서 생존자들과의 모임에 참석하였다.
그 가을, 웨버 주립 대학교는 학교의 저명한 서비스 졸업생을 기념하기 위한 의식을 진행하였다.
웨버 식 안정에서 그의 가족은 그의 이타성과 용기에 대해 알게 되었다.
메달 오브 아너, 해군 십자훈장, 금성 훈장 및 청동성 훈장을 포함해서 그는 이오지마에서 부상당한 세 개의 퍼플 하트를 수여받았다.
유타주 소속 병원 이름 변경
이미지 출처:v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