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전투와 토마스 앤더슨의 군대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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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앤더슨의 지휘하에 있던 밴쿠버 막사가 필리핀 전투의 시작과 함께 종료되었다. 그는 미국 역사에서 해외에서 복무한 첫 번째 장군이 되었다.
앤더슨은 오하이오에서 태어났으며, 신시내티의 로스쿨을 졸업한 후 오하이오와 켄터키에서 변호사로 활동했다. 미국 남북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기병대에서 중위로 복무를 시작했고, 전쟁 중 전투에서 승진하여 루징전투와 스팟서바이니아 전투 후에 대령으로 진급하게 된다.
전쟁이 끝난 후 앤더슨은 서부로 떠났고, 1886년 밴쿠버 막사를 지휘하기 전, 12년간 텍사스에서 기아 인디언과의 접전을 경험했다. 당시 50세의 앤더슨은 그의 가족과 함께 루퍼스 잉갈스 홀이라는 이름이 붙은 막사 건물에서 거주했으며, 이 건물은 1985년에 부분적으로 소실되었다.
1897년, 그의 법률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앤더슨은 전쟁부와 니스콸리 가톨릭 주교 사이의 수십 년간의 소송에서 승소하였다. 군은 성 제임스 가톨릭 교회와 인접한 홀리 엔젤스 학교를 군사 기지에서 제거하려 하였고, 주교는 1848년 기부지 법에 따른 소유권을 주장하며 반대하였다. 앤더슨은 미국 대법원에서 주장한 바와 같이 허드슨 베이 회사가 군이 인수할 당시 해당 지역의 소유자였음을 증명했다.
1년 후, 앤더슨은 14보병 연대 소속의 100명의 군인과 함께 알래스카 스카그웨이로 떠나 금광을 찾는 사람들의 안전을 지켰지만, 군은 그를 알래스카에서 철수시키고 필리핀으로 보내게 된다. 그는 축전으로 대장으로 진급하였다. 필리핀에서 앤더슨은 첫 번째 필리핀 원정군을 지휘하였고, 그의 명령 아래에는 이전에 그와 함께 복무했던 14보병 연대의 군인들이 포함되었다.
스페인은 1898년 스페인-아메리카 전쟁을 끝내는 합의의 일환으로 필리핀을 미국에 양도하였다. 이로써 미국의 ‘뜻이 있는 운명’은 태평양으로 확장되었다.
그러나 필리핀 인들은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1896년부터 싸웠으며, 미국의 존재를 제국주의로 인식하였다. 이들은 스페인과의 전투에서 미국의 식민지 확장으로 전환하여 결국 1899년에 필리핀-미국 전쟁을 촉발하였다. 미군은 필리핀 국민과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했으며, 군대 내에서의 편견, 불신 및 폭력의 증거들이 많았다.
앤더슨은 1899년 2월 마닐라 전투에서 미 육군 제1사단을 지휘했으며, 19,000명의 미국 병사와 15,000명의 필리핀 민병대가 맞섰다. 필리핀 대통령 에밀리오 아길라르는 휴전 협정을 중재하려 했지만 앤더슨의 상관들은 이를 거부하였다. 마닐라에서 미국이 승리하였지만, 필리핀에서는 게릴라전이 계속 진행되었고, 대부분의 병력이 1902년 7월까지 항복하지 않았다. 미국 군인 약 4,800명이 사망하고 2,800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러나 필리핀에서의 피해는 더욱 심각하여 약 20,000명의 전투원이 사망했으며, 질병, 기아 및 폭력으로 인한 민간인 사망자는 추정치로 20만 명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1900년 은퇴한 앤더슨은 포틀랜드로 이주하였고, 1917년 민간 및 스페인-아메리카 전쟁 참전 용사들을 위한 발언을 준비하다 사망하게 된다. 그는 아내와 함께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이미지 출처:columbi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