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사리오 해밀린, 치카노 문화의 전설이 된 록 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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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https://www.kpbs.org/podcasts/san-diego-news-now/san-diego-county-sees-slight-increase-in-covid-hospitalizations
샌디에고의 유명 록 스타 로사리오 해밀린이 다음 달로 80세 생일을 맞는다.
해밀린은 치카노 공동체의 아이콘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그녀의 시작은 바로 내셔널 시티에서 시작되었다.
로사리오 해밀린은 오레곤에서 태어났으나, 그녀의 아버지가 군 복무를 하면서 가족은 여러 곳에서 이사 생활을 했다.
결국 그들은 내셔널 시티에 정착하게 된다.
이웃이자 절친인 로겔리오 카자레스는 해밀린의 집에서 자주 놀곤 했다.
그는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지 않지만, 해밀린의 연주는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녀는 클래식 피아노를 연주했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우리를 위해 맥주를 사주곤 했어요.”
내셔널 시티는 주로 라틴계 공동체로 구성되어 있다.
남부 캘리포니아의 셰어드 컬러 교수, 헤라르도 리오스는 1960년대의 사회적, 정치적 각성을 경험한 치카노와 라틴계의 상황을 설명한다.
“1960년대는 해방의 시대였고, 라틴계 사람들이 미국 사회 내에서 자신의 자리를 확립하고자 했던 시대였습니다.”
해밀린의 가장 큰 꿈은 가수가 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14살 때 사랑의 시를 써서 “Angel Baby”라는 곡으로 만들었다.
1960년 여름, 해밀린과 그녀의 친구들은 샌 마르코스의 한 임시 녹음 스튜디오로 가서 그 곡을 녹음했다.
그들은 샌디에고의 한 크레스기 백화점 직원에게 이 곡을 틀어줄 수 있는지를 부탁했다.
이 곡은 대박이 났다.
곡을 들은 청소년들은 이를 사기 위해 몰려들었다.
해밀린과 그녀의 친구들은 하이랜드 레코드의 직원에게 눈에 띄었고, 곧 계약을 체결하게 된다.
그들은 “로지 & 더 오리진널즈”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게 된다.
“Angel Baby”는 샌디에고부터 뉴욕, 시애틀까지 전국적으로 방송된다.
이 곡이 출시된 지 두 달 만에 빌보드 핫 100에서 5위를 기록했으며, 내셔널 시티에서는 1위의 크루징 송으로 자리잡았다.
카자레스는 해밀린의 친구로서 그녀의 재능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Fort Ord에서 복무 중일 때, Angel Baby가 나와서 내가 아는 여자애라고 말했는데 아무도 믿지 않았어요.”
리오스 교수는 해밀린의 성공이 세르히오 차베즈와 돌로레스 후에르타와 같은 민권 지도자들의 등장과 관련이 있다고 지적한다.
“치카노들이 스스로를 옹호하고 제도적인 불평등에 반대하기 시작한 시기와 맞물려 있습니다.”
해밀린은 당시 치카노 여성들이 직면한 성차별과 남성 중심 문화 속에서도 성공을 거두어야 했다.
여성들은 전통적인 가정 역할을 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았으며, 여성이 일할 경우 남성과 동일한 일을 해도 훨씬 적은 급여를 받았다.
노르마 카자레스는 그 당시 내셔널 시티에서 자란 사람으로 해밀린의 상황을 회상했다.
“그땐 정말 힘든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시기에 그녀 같은 여성이 주목받기란 어려웠어요.”
그러나 해밀린은 “Angel Baby”의 저작권과 로열티를 회복하기 위해 싸워야 했다.
그녀는 여러 차례 소송을 제기하였고, 거의 20년 후에야 이긴다.
2001년, 로지와 더 오리진널즈는 “Angel Baby”의 새로운 버전을 스팬글리시로 발표했다.
이 곡은 많은 치카노 및 라틴계 가정의 찬가가 되었다.
카자레스는 해밀린이 많은 치카나들에게 영감을 주었다며 강조했다.
“그녀는 내셔널 시티에 자부심을 주었고,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 대해 이야기하며 아이들도 그녀를 알아요.”
해밀린은 2017년에 뉴멕시코에서 잠을 자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71세였다.
로사리오 해밀린의 음악은 사랑을 죽음 너머로 확장시킨 사례로 남아 있으며, 그녀의 유산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